찰리 게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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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리 게링거는 1903년 미시간주에서 태어난 미국의 야구 선수로, 1926년부터 1942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2루수로 활약했다. 그는 통산 타율 0.320, 2,839안타를 기록했으며, 1937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다. 게링거는 6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29년에는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194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기계 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2루수로서 뛰어난 수비 실력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에는 사업가로도 활동했으며, 199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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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게링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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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찰리 게링거 |
원어 이름 | Charlie Gehringer |
출생일 | 1903년 5월 11일 |
출생지 | 미시간주 파울러빌 |
사망일 | 1993년 1월 21일 |
사망지 | 미시간주 블룸필드힐스 |
포지션 | 2루수 |
타격 | 좌투 |
투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대학 | 미시간 대학교 |
프로 입단 | 1924년 |
드래프트 순위 | 해당 사항 없음 |
소속 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24–1942) |
첫 출장 (MLB) | 1924년 9월 22일 |
마지막 출장 (MLB) | 1942년 9월 27일 |
등번호 | 2 (영구 결번) |
통계 (MLB) | |
타율 | .320 |
안타 | 2,839 |
홈런 | 184 |
타점 | 1,427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 6회 (1933–1938) |
월드 시리즈 우승 | 1935년 |
AL MVP | 1937년 |
AL 타격왕 | 1937년 |
AL 도루왕 | 1929년 |
명예의 전당 헌액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1949년) |
명예의 전당 투표 득표율 | 85.0% (6번째 투표) |
야구 관련 기록 | |
2루수 병살 처리 | 통산 |
2루수 어시스트 | 통산 |
2루수 퍼트아웃 | 통산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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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미시간주 리빙스턴 카운티 이오스코 타운십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레너드와 테레자 게링거는 독일인 이민자였으며, 찰리는 4명의 자녀들 중 셋째였다. 그는 또한 부친의 첫 결혼 생활로부터 7명의 의붓형제·자매를 두기도 하였다. 찰리가 3세 때 가족은 리빙스턴 카운티 파울러빌 남부에 있는 에드 에인절 농장으로 이주하였으며, 어린 찰리는 농장일을 좋아하지 않았다.[4]
게링거는 아메리칸 리그의 첫 올스타 2루수였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계약하기 전에는 그 포지션에서 뛰어본 적이 없었다. 미시간 대학교에서는 3루수였고, 디트로이트에 3루수로 보고했지만, 타이 콥 감독은 3루에 보비 존스와 프레드 헤이니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게링거를 2루로 옮기고 마이너 리그로 보냈다.
야구는 시작부터 달랐으며, 찰리는 가끔 연상의 소년들과 함께 야구를 하였다. 그는 파울러빌 고등학교에서 내야수와 투수로 활약하며 3년 동안 단 한 경기만 패배하였다. 그 야구장은 현재 게링거 필드로 불리고 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922년 완고한 농장일을 다룬 자신의 형을 돕기 위해 부모는 사람을 고용했고, 찰리는 체육을 전공하러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농장을 떠났다. 그는 야구에서 신입생 편지를 받았고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 후 그는 파울러빌 타운 팀에서 인디애나주 앙골라에 있는 무소속팀으로 옮겨갔다.[23]
1923년 가을, 찰리가 영구적으로 농장을 떠날 기회가 찾아왔다. 보비 비치와 함께 사냥하던 한 지방 사람이 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외야수에게 찰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디트로이트에서 실력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3. 프로 야구 경력
1926년 빅리그에 합류했지만 벤치에서 시작했다. 신인 선수로서 123경기에 출전하여 .277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해 겨울, 타이거스는 콥 감독을 내보내고 조지 모리아티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모리아티 감독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부터 마티 맥매너스를 영입하여 2루수로 기용하고, 게링거를 잭 워너의 백업 선수로서 3루로 옮겼다. 맥매너스가 2루에 있는 동안 게링거는 "만능 3루수"로서 벤치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27년 .317의 타율을 기록하며 13번의 .300 이상 타율 시즌의 시작을 알렸다. 1932년 .298의 타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매년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1929년에는 .339의 타율을 기록하고 안타(215개), 득점(131점), 2루타(45개), 3루타(19개), 도루(27개)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30년에는 201개의 안타와 47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330의 타율을 기록했다. 1931년 부상으로 인해 10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311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듬해 152경기에 출전하여 .298의 타율과 44개의 2루타, 107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1933년 첫 올스타 경기가 열렸고, 게링거는 스타 선수들 중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38년까지 그는 모든 올스타 경기에 선발 출전한 유일한 선수였다. 1934년 경기에서 칼 허벨이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 게링거는 1루타로 경기의 선두 타자로 나섰다. 그는 하이니 매누시가 볼넷으로 출루하기 전에 실책으로 2루까지 진루했다. 게링거는 6번의 올스타 경기에서 .500의 최고 타율(10타수 20안타 2도루)을 기록했다. (2013년 기준)
1934년 미키 코크런 감독 아래의 타이거스는 1909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게링거는 득점(134점)과 안타(214개)에서 아메리칸 리그 1위를 기록했고, .356의 타율로 타이거스를 이끌었다. 타이거스는 7경기 만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월드 시리즈에서 패했다. 시즌 후, 그는 일본을 순회한 올스타 팀의 일원이었다.
193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월드 시리즈에 복귀하면서 게링거는 .330의 타율과 124개의 득점으로 팀을 이끌었고, 6경기 만에 시카고 컵스를 꺾었다. 게링거는 시리즈에서 .375의 타율을 기록했다.
1937년 34세의 나이로 게링거는 아메리칸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그는 .371의 타율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209개의 안타, 133개의 득점, 96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1938년 시즌은 게링거의 마지막 올스타 시즌이었으며, 107타점, 174안타, .306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 해는 게링거가 레이 포사이스와 함께 자동차 산업 제조업체 대표로서 사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게링거의 경력은 서서히 끝나갔다. 1939년에는 11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86타점과 함께 132안타, .325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듬해는 그가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마지막 해였고, 타이거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면서 198득점, 81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7경기 모두 출전하여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한 경기에서 .214의 타율을 기록했다.
1941년 게링거는 127경기에 출전했지만, 그의 타율은 .220으로 떨어졌다. 1942년에는 선수 겸 코치를 맡았으며, 9월 23일 미국 해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268의 타율을 기록했다.
게링거는 통산 .320의 타율을 기록했다. 1942년 시즌이 끝날 때, 그는 통산 타율 37위, 2루타(574개) 6위를 기록했다. 그는 1939년 5월 27일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타이거스 역사상 1927년 9월 3일부터 1931년 5월 7일까지 511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게링거는 타이거 스타디움이 폐장할 때인 1999년 팬들이 선정한 타이거스 역대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었다. 1983년 그의 등번호 2번과 행크 그린버그의 등번호 5번은 타이거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1934년 전미 선발팀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해 미일 야구에 출전했을 때 사와무라 에이지에게 "전미군 클린업 4연속 삼진"을 당한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72]
3. 1. 마이너 리그 (1923-1925)
1923년 가을, 미시간 대학교에서의 첫 해를 마친 후, 게링거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좌익수 바비 비치에 의해 발탁되었다.[5] 비치는 포울러빌에서 사냥을 하던 중 친구 플로이드 스미스가 게링거를 한 번 보라고 권유했다.[10] 비치는 그를 나빈 필드로 데려가 훈련을 시키고 타이거스에게 그의 기량을 선보였다.[5] 선수 겸 감독 타이 콥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구단주 프랭크 나빈에게 즉시 게링거와 계약을 맺으라고 요청했다고 전해진다.[6]
1924년, 게링거는 클래스 B 런던 테쿰세스에서 미시간 온타리오 리그에서 뛰었다. 9월 말에 잠시 콜업되어 타이거스에서 5경기에 출전하여 13타수 0.462의 타율을 기록했다. 1925년 인터내셔널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뛰며 0.325의 타율, 206개의 안타, 2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7] 1925년 시즌 말, 그는 잠시 콜업되어 타이거스에서 8경기에 출전하여 18타수 0.167의 타율을 기록했다.[34]
3. 2.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26-1942)
게링거는 1926년 봄에 타이거스의 정규 시즌 로스터에 합류했다. 2루수 프랭크 오루크가 홍역에 걸리자, 1926년 4월 28일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했다. 게링거는 치명적인 실책 2개를 범했고,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34] 타이거스의 2루수 자리를 맡아 1926년에 해당 포지션에서 112경기에 출전했다. 타율 0.277을 기록했고, 3루타 17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아메리카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스몰볼을 선호하는 타이 콥 아래에서 개인 통산 최다인 27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34] 콥이 팀을 떠난 후, 다시는 27개에 가까운 희생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1926년 시즌 후, 타이 콥이 타이거스를 떠났고, 조지 모리아티가 감독으로 그를 대신했다. 오프 시즌 동안, 모리아티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부터 마티 맥매너스를 영입했다. 모리아티는 1927년 시즌 시작 시 맥매너스를 주전 2루수로 선택했지만, 맥매너스가 징계 사유로 벤치에 앉게 되면서, 2루수 선발 라인업으로 복귀할 기회를 얻었다.[11]
이 기회를 잡아 1927년에 획기적인 시즌을 보냈다. 아메리칸 리그 2루수 중 438개의 어시스트, 84개의 병살타 처리, 그리고 6.19의 수비율로 리그를 이끌었다.[34] 타자로서도 발전하여, .317의 타율과 110득점을 기록하여 아메리칸 리그에서 4위를 기록했다.[34]
1928년에는 타이거스를 위해 154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511경기 연속 출전 기록을 시작했다. .320의 타율을 기록했고, 193개의 안타(리그 5위), 108득점(리그 5위)을 기록했으며, 507개의 어시스트(2루수 리그 최고)를 기록했다. 1928년 시즌이 끝날 때,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19위를 기록했다.[34]
꾸준한 발전은 1929년에도 이어져, .339의 타율에 .405의 출루율, .532의 장타율, 106타점을 기록했다. 215개의 안타, 45개의 2루타, 19개의 3루타(8월 5일 한 경기에서 3개 포함), 131득점, 27개의 도루로 아메리칸 리그를 이끌었다. 2루수로서의 수비 기회(404개)와 수비율(.975)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501개의 어시스트로 2위를 기록했다.[34]
1930년, .330의 타율에 .404의 출루율, .534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144득점(리그 3위)과 201개의 안타, 78개의 장타, 47개의 2루타(리그 3위), 15개의 3루타(리그 5위), 19개의 도루(리그 2위)를 기록했다.[34]
상대적으로, 1931년은 "부진한" 해였다. 연속 출장 기록은 5월에 끝났고, 단 101경기에 출전했다. 또한 1926년에서 1941년 사이에 유일하게 .300 이하(.298)의 타율을 기록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기준에서 훌륭한 해를 보냈고, 1931년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17위를 기록했다.[34]
1932년, 완벽한 컨디션으로 돌아와 152경기에 출전하여 .325의 타율, 112득점, 107타점, 44개의 2루타(리그 2위)를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장타자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2년에 19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아메리칸 리그에서 7위를 기록했다. 그해 말, 리그 MVP 투표에서 9위를 기록했다.[34]
1933년, 타이거스를 위해 155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330의 타율(아메리칸 리그 5위), 204개의 안타(리그 2위), 42개의 2루타(리그 4위), 105타점, 그리고 커리어 최고 기록인 542개의 어시스트(2루수 리그 최고)를 기록했다. 다시 한번 1933년 MVP 투표에서 상위 득표자 중 하나였으며, 이번에는 6위를 기록했다.[34]
1934년, 15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타이거스를 25년 만에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타율 0.356과 출루율 0.450은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득점 134점, 안타 214개로 리그를 이끌었고, 2루타 42개(리그 2위)와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인 127타점(리그 5위)을 기록했다.[34] 1934년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디트로이트의 선수 겸 감독인 미키 코크런에 단 2점 차로 뒤져 2위를 차지했다.
193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 내야진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격 조합 중 하나였다. 행크 그린버그가 1루, 게링거가 2루, 빌리 로젤이 유격수, 마브 오웬이 3루를 맡아 1934년 타이거스 내야진은 769안타, 462타점, 2루타 179개를 합작했다.
193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월드 시리즈로 돌아오면서 .330의 평균과 124개의 득점과 함께 팀을 지도하고 6개의 경기들에서 시카고 컵스를 꺾었다. 시리즈에서 .375점을 타구하였다.
1937년 34세의 나이로 아메리칸 리그의 MVP로 선발되는 데 4년의 세월에 코크런(1934)와 그린버그(1935)에 이어 3번째 타이거스 선수가 되어 22세의 뉴욕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에 4점 앞섰다. .371점을 타구하여 게릭에 20점과 디마지오에 25점 앞서 리그를 지도하였다. 209개의 안타, 133개의 득점과 96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1938년 시즌은 올스타로서 마지막이었으며, 107개의 타점과 174개의 안타와 함께 .306점을 타구하였다.
경력은 서서히 끝나갔으며, 1939년 118개의 경기들 만을 활약하여 86개의 타점과 함께 겨우 132개의 안타에 .325점을 안타하였다. 이듬해는 .300점 이상을 안타한 마지막이었고, 타이거스가 월드 시리즈로 가면서 198개의 득점을 매기고 81점에서 타구하였다. 7개의 경기들에서 전부 활약하여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한 그 경기들에서 .214점을 타구하였다.
1941년 127개의 경기들에서 활약하였으나 평균은 .220점으로 떨어졌다. 1942년으로 봐서 선수 겸 코치였으며 9월 23일 미국 해군에 입대되기 전에 .268의 평균을 매겼다.
3. 3. "기계 인간"
게링거는 타자 및 수비수로서의 일관성으로 인해 "기계 인간(The Mechanical Ma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1] 1936년 5월 린우드 레리는 "저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기계야."라고 말하며 이 별명을 처음 사용했다.[22] 당시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은 "터빈처럼 꾸준한 게링거는 나폴레옹 라조이 이후 어떤 내야수보다도 기계적 완벽함에 가깝다"라고 언급했다.[22] 레프티 고메즈 뉴욕 양키스 투수가 그에게 이 별명을 붙였다는 자료도 있다.[23] 한 자료에 따르면 고메즈는 "봄에 그를 태엽을 감아놓으면 0.330 또는 0.340을 치고 시즌이 끝나면 멈춘다"라고 말했다.[24]
3. 4. 일본과의 교류
1934년에 전미 선발팀의 일원으로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미일 야구에 출전했을 때 사와무라 에이지일본어에 의한 "전미군 클린업 4연속 삼진"을 당한 한 사람이기도 하다.[72] 또한, 다음 1935년에 일본 선발팀이 미국에 원정했을 때에도 선발팀의 일원으로서 대전했다.[72] 시즌 후에는 일본을 순회한 올스타 팀의 일원이었다.[72]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야구 선수들도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39세의 게링거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해군 징병 본부에서 신체 검사를 받았다.[36] 1942년 12월 1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입대식에서 그는 해군 중위로 임관했다. 당시 게링거는 기자들에게 "야구가 저에게는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37][38]
게링거는 캘리포니아주 세인트메리스 대학교의 해군 비행 훈련 학교에 배정되었다.[39] 그는 세인트메리스 비행 훈련 학교 야구팀에서 2루수로 뛰었다.[40] 그는 또한 세인트메리스 비행 훈련 학교의 야구 및 축구 코치였다.[41]
이후 게링거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 있는 해군 비행 훈련 학교로, 1945년 2월에는 플로리다주 잭슨빌로 전출되었다.[41] 1945년에는 잭슨빌 해군 항공 기지 플라이어스 야구팀을 24승 5패의 기록으로 이끌었고, 타율 0.438을 기록했다.[42]
게링거는 1945년 11월 7일 해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으며, 그는 야구 은퇴와 1938년 친구와 함께 설립한 제조업체 대리점인 게링거 앤 포사이스로 복귀할 의사를 발표했다.[43] 그는 1946년 1월 브리그스 스타디움에서 은퇴를 확인하고 "조직 야구 자진 은퇴 신청서"에 서명했다.[44] 게링거는 나중에 "군 복무를 통해 몸 상태가 너무 좋아져서 몇 년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45]
5. 은퇴 이후
게링거는 은퇴 후에도 야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4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나, 결혼 준비로 인해 6월 13일에 열린 헌액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1월에 투표가 열렸고 게링거는 결승전에 선출되었지만, 결혼 계획 때문에 쿠퍼스타운에 갈 수 없었다.[16]
businessman영어으로서 게링거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포사이스는 그에게 자동차를 팔아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었다. 게링거와 포사이스는 자동차 산업에 부품과 부속물을 판매했다. 그들의 첫 성공은 실내 장식 단추였다. 뉴욕의 앤 프리돌프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특허 대리인은 게링거와 포사이스의 친구였다. 포드와 크라이슬러가 계약을 맺고, 제네럴 모터스가 이어서 계약했다. 그들은 실내 장식 물질, 카페트 등 다른 인테리어 제품들도 추가하였다. 그는 1974년에 은퇴하였다.
게링거는 1951년 8월부터 1953년 시즌 말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총지배인으로 복귀했고, 1960년까지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높은 연봉을 받는 팀을 물려받아 급여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이적을 해야 했다. 1952~53년의 타이거스는 110승 198패 6무로 부진했다. 하지만 게링거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알 칼라인을 스카우트했다.
게링거는 양키스의 Old Timer's Days영어에 정기적으로 참여했고, 1965년 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골프를 즐겼으며, 1929년 파울러빌 주민들이 네이빈 필드에서 게링거를 위한 날을 개최하고 골프채 세트를 선물하기도 했다.
게링거는 다임스 행렬, 빅 브라더스, Boys and Girls Clubs영어, 오클랜드 대학교와 웨인 카운티에서 활동하며 의장을 20년 동안 맡았다. 그는 많은 서명 회합을 개최하고 인기 있는 연설자였다.
10년간 야구계를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링거는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집은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었지만, 식사 시간에 사람들이 찾아와 사인이나 시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1993년 1월 21일 미시간주 블룸필드힐스에서 89세의 나이로 발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1983년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열린 행사에서 타이거스는 게링거와 행크 그린버그의 등번호 2번과 5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다. 82세의 게링거는 198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 아메리칸 리그 명예 주장을 맡았다.
6. 사망
1993년, 미시간주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카로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에서 활약하며 통산 3000탈삼진을 달성하는 등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존 스몰츠가 있다.[72]
7. 수상 및 영예
194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정규 투표에서 게링거는 153표 중 102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지만, 필요한 75%에는 미치지 못했다. 야구 기자들은 1949년 5월에 결선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47] 게링거는 결선 투표에서 187명의 기자 중 159명(85%)의 선택을 받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48]
1933년 첫 올스타 경기가 열렸고 게링거는 스타 선수들 사이에 스타 선수였다. 1938년까지 그는 모든 경기를 위하여 선발 출전한 유일한 선수였다. 1934년 경기에서 칼 허벨이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스트라이크아웃 시키면서 첫 이닝을 끝낼 때 게링거는 1루타로 선두 타자를 기록했다. 게링거는 2013년까지 6개의 경기(첫 올스타 경기에서 1루타를 포함한 10타수 20안타, 2개의 도루)에서 .500의 최고 올스타 타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37년 34세의 나이로 게링거는 아메리칸 리그 MVP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4년 동안 미키 코크런(1934)과 행크 그린버그(1935)에 이어 타이거스 선수로는 세 번째였다. 그는 22세의 뉴욕 양키스 조 디마지오를 4점 차로 앞섰다.
1983년 게링거의 등번호 2번과 그린버그의 등번호 5번은 타이거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1999년 게링거는 팬 투표를 통해 타이거스 역사상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었다.
1999년, 게링거는 ''스포츠 뉴스''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46위에 올랐으며,[69]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같은 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미시간 출신 최고의 스포츠 선수 50인" (전 종목) 목록을 발표했고, 게링거는 조 루이스와 매직 존슨에 이어 3위에 랭크되었다.[70]
2013년, 밥 펠러 용감한 행위상은 게링거를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37명의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71]
- 주요 수상 및 영예는 다음과 같다.
수상 및 영예 | 횟수 | 연도 |
---|---|---|
수위 타자(MLB) | 1회 | 1937년 |
도루왕 | 1회 | 1929년 |
시즌 MVP | 1회 | 1937년 |
월드 시리즈 출전 | 3회 | 1934년, 1935년, 1940년 |
올스타 게임 선출 | 6회 | 1933년 - 1938년 |
MLB 올 센추리 팀 선정 | 1회 | 1999년 |
시즌 200안타 | 7회 | 1929년, 1930년, 1933년 - 1937년 |
8. 개인적인 삶
게링거는 1903년 5월 11일 미시간주 아이오스코 타운십의 파울러빌 남서쪽에 있는 농장에서 태어났다.[4] 그는 레너드 게링거와 테레사 (한) (아이즐) 게링거의 둘째 아들로, 두 사람 모두 독일계 가톨릭 이민자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이전에 결혼한 적이 있었고, 찰리는 레너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8명의 이복 형제와 어머니의 첫 번째 결혼에서 이복 누이를 두었다. 어린 시절에 가족은 미시간주 핸디 타운십의 파울러빌 바로 남쪽에 있는 다른 임대 농장으로 이사했다.[4]
1922년, 파울러빌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링거는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체육 수업을 들었고 농구와 야구를 했다. 게링거는 나중에 농구에서는 선수로 활동했지만 야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회상했다.[23]
게링거는 조용하고 소탈한 것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선수 겸 감독 미키 코크란은 "찰리는 개막일에 '안녕'이라고 말하고, 폐막일에 '안녕'이라고 말하며, 그 사이에는 .350의 타율을 기록한다"고 농담했다.[12] 게링거는 자신의 조용한 태도를 인정하며, "저는 시끄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내야에서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많은 감독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명성에 대해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기리는 시민 만찬에서 게링거의 연설은 "저는 야구계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 명성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였다. "Chas. Gehringer"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네 글자로 충분한데 왜 일곱 글자를 사용해야 하죠?"라고 답했다. 또 다른 경우,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평판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사실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에게 질문을 하면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소금을 주세요'라고 말하면, 소금을 건네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소탈한 성격은 1929년 타이거스가 개최한 "찰리 게링거의 날"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게링거의 고향과 디트로이트 전역에서 온 팬들이 양키스를 상대로 17–13으로 승리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게링거는 2루에서 10개의 기회를 처리했고, 홈런을 포함해 4개의 안타를 기록했으며, 홈 스틸을 성공시켰다. 기념식에서 포울러빌 시민들은 게링거에게 골프 클럽 세트를 선물했다. 클럽은 오른손잡이용이었고, 게링거는 왼손잡이였지만, 게링거는 왼손잡이용 클럽 세트로 바꾸는 대신 오른손잡이로 골프를 배우기로 했다.[13]
오프 시즌 동안 게링거는 디트로이트 시내의 허드슨 백화점(Hudson's)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다. 그는 또한 다른 메이저 리그 선수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번스타밍을 했다. 한 해에는 니그로 리그의 투어 그룹과 함께 여행했는데, 여기에는 새첼 페이지, 벅 레너드, 주디 존슨, 뮬 서틀스 등이 포함되었다. 게링거는 페이지의 패스트볼과 헤지테이션 피치를 치는 것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페이지는 게링거가 자신이 상대했던 최고의 백인 타자였다고 말했다.[16]
게링거의 아버지는 1924년 7월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게링거는 어머니를 미시간 주, 파울러빌 외곽의 가족 농장에서 데려와 디트로이트에서 함께 살았다.[13] 게링거는 그의 어머니가 그가 경기하는 것을 보러 야구장에 오거나 해리 하일먼의 라디오 중계를 현관에서 듣는 "열렬한 팬"이었다고 언급했다.[13] 그의 어머니는 1946년 7월에 사망했다.[46]
1949년 야구 명예의 전당 정규 투표에서 게링거는 153표 중 102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지만, 필요한 75%에는 미치지 못했다. 야구 기자들은 1949년 5월에 결선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47] 게링거는 결선 투표에서 187명의 기자 중 159명(85%)의 선택을 받아 명예의 전당 자격을 얻었다.[48] 게링거는 결혼식을 5일 앞두고 쿠퍼스타운, 뉴욕에서 열린 입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49년 6월, 내시-켈비네이터사(Nash-Kelvinator Corp.)의 비서였던 조세핀 스틸렌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서 열렸다.[49][50] 두 사람은 게링거가 사망할 때까지 40년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51][52]
9. 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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